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로마의 치명적인 실책 ==== '''이렇게 양쪽 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던 도중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치명적인 외교적 빌미를 오스만 측에 제공해 버린다.''' 당시 동로마의 재상이자 명문가 노타라스 가문 출신의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의 위세를 꺾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할릴 파샤와 메흐메트 2세에게 당시 술탄위 계승 과정에서 쫓겨나 동로마 제국 내에 망명 와 있었던 오스만 왕족 오르한을 먹여 주고 재워 주며 사고 안 치게 관리하는 비용을 추가로 내놓으라 한 것이다.[* 사실 [[동로마]]가 오스만의 술탄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을 내세운 것이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바예지트 1세]] 사후에 아들 4형제가 내전을 벌이던 무렵에는 장남인 쉴레이만과 동맹을 맺어 상실한 영토 일부를 일시나마 수복한 적이 있었으며, [[무라트 2세]]가 즉위했을 당시에는 무라트에게 삼촌이 되는 무스타파를 지원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다만 이미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쳐들어올 때를 직감하고 도박수를 던진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오스만 궁정 내 여론이 갈리는 도중에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에서 먼저 이렇게 도발을 하고 나오니 할릴 파샤를 비롯한 기득권층조차 더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반대할 명분이 사라졌다. 메흐메트 2세는 일단은 동로마 측의 사신에게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먼저 진압하고 나서 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사신에게 따로 할릴 파샤가 내지른 성토를 보면 당시 '''동로마 제국의 남은 존재 자체가 오스만 술탄국에게 위험이 되는 이유'''가 상당히 극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오오, 멍청하고 어리석은 '''[[로마인|로마 놈]]들아,''' 네놈들의 교활함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무라트 2세|지난 술탄]]께서는 네놈들에게 관용을 베푸셨겠지만, [[메흐메트 2세|지금의 술탄]]께서는 생각이 다르시다. ··· 네놈들은 지난 술탄께서 너희들과 체결하신 화평의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도 우리를 헛된 망상으로 겁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스만 술탄국|우리]]는 힘도 생각도 없는 어린애가 아니다.''' 네놈들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한번 해 봐라. [[트라키아]]에서 오르한을 술탄으로 옹립해 보든지, [[도나우 강]] 너머에 있는 헝가리 놈들을 불러오든지[* 1444년의 [[바르나 전투|바르나 원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뭐든지 해 보란 말이다. 다만 이것만 명심하거라.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너희는 [[로마 제국|고토]]를 회복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남은 것마저도 [[멸망|몽땅 잃을 것이다.]]''' >---- >(해리 J. 마골리아스(Harry J. Margoulias), 『Decline and Fall of Byzantium to the Ottoman Turks: An Annotated Translation of "Historia Turco-Byzantina"』 p.193, 도널드 M. 니콜(Donald M. Nicol),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 p.375.)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 이 대화는 15세기 동로마의 역사가 두카스(Doukas)가 남긴 기록물에 실려 있다. 후기 [[동로마 제국/역사|동로마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는 두카스의 기록물은 별도의 제목이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옛날에는 단순히 '역사'로 불리다가 1834년 독일 학자 베커(August Immanuel Bekker)에 의해 『Corpus Scriptorum Historiae Byzantinae』라는 이름으로 그 번역본이 나왔으며, 이후 1958년 루마니아 학자 그레쿠(Vasile Grecu)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새 번역본을 『Historia Turco-Byzantina』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이를 1975년 미국 학자 마골리아스(Harry J. Margoulias)가 영어로 번역한 것이 『Decline and Fall of Byzantium to the Ottoman Turks: An Annotated Translation of "Historia Turco-Byzantina"』. 두카스의 사료를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마골리아스의 책은 오늘날까지도 두카스의 기록물 연구와 관련한 준(準)1차 사료로써 전 세계의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동로마를 다룬 서적의 참고 문헌 목록에서 마골리아스의 번역본을 기재해 놓지 않은 책이 드물 지경. 두카스의 기록물을 번역한 이들 책의 제목에 달린 '비잔티움'이란 단어는 후세의 번역가들이 임의로 집어넣은 거지 원작자 두카스가 달아 놓은 것이 아님을 유의할 것. 그런데 문제는 두카스의 기록 및 이를 충실히 번역한 자료를 무시한 채 특정 단어를 자기 입맛에 맞게 바꿔서 연구 결과를 내놓는 학자들이 몇몇 있다는 점이다. 두카스가 기록한 "오, 멍청하고 어리석은 '''로마 놈들아'''"의 원문 문장은 "ώ ανόητοι και μωροί '''Ρωμαίοι'''"이다. 마골리아스는 이를 "O stupid and foolish '''Romans'''"라고 제대로 번역했으나, 니콜(Donald M. Nicol)은 저서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에서 해당 문장을 "You stupid '''Greeks'''(이 멍청한 '''그리스 놈들아''')"라고 엉뚱하게 바꾸어 놓았으며, 오늘날 [[영어 위키백과]]를 포함한 웹상에는 이를 그대로 복붙한 자료가 넘쳐나는 실정이다. 교수가 내놓은 책이든, 일개 학생이 쓴 리포트든 가릴 것 없이. 당시 이슬람 세계는 [[무함마드]]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이전부터 동로마를 오랫동안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기에 할릴 파샤가 "그리스 놈들아"라고 일갈했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며, 두카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와 관계 없이 일단 원문을 간접 인용도 아닌 직접 인용한 이상 그 글 그대로 실어 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Romans'를 'Greeks'로 바꿔 버렸으니 이뭐병. [[동로마 제국]] 문서에도 나와 있다시피 제국 및 그 신민을 일컫는 용어로서의 '로마'의 사용 여부는 당대인의 역사관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이기에, 이는 후대인이 함부로 '그리스'로 바꿔서 번역할 만한 성질의 단어가 절대로 아니다. 이러한 사례는 [[이슬람]]의 [[경전]] [[쿠란]]의 30번째 수라 '로마장'이나 [[무함마드]]가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낸 편지 등을 영문으로 번역한 여러 글에서도 적잖이 발견되기에, 동로마와 관련한 당대의 사료를 번역한 글에서 제국을 그 시대의 서유럽인들이 '비잔티움'이라고 지칭했거나[* 그때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무슬림]]들이 '[[그리스]]'라고 지칭한 것이 보이면 혹시 번역가의 쓸데없는 주관이 개입한 건 아닌지 의심하면서 원문에는 어떻게 기재되어 있는지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고대에도 '로마의 신민'이 아닌 '특정 인종'을 일컫는 용어로 '라틴인'이란 말이 쓰이기도 했듯이, 동로마에 대해서도 그 신민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인종들 중 하나를 가리키는 수단으로서 '그리스인'이란 말이 아예 안 쓰인 건 아니다. [[그리스인]]의 안내를 받아 [[하기아 소피아]]를 둘러봤다고 쓴 [[키예프 공국]] 사절단의 기록이 그 사례. 그러나 이와는 무관하게 원문 사료에는 분명히 '[[로마인]]'으로 기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인이 멋대로 이를 '그리스인'으로 번역한 것은 비판받을 만한 일이다. 당대에 '그리스인'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어서 '그리스인'을 뜻하는 말로 '로마인'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그리스인'을 가리키는 단어와 '로마인'을 가리키는 단어가 별도로 존재했다. 이 둘이 완전한 동의어라면,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이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Грка)'를 모두 칭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두샨이 이 두 칭호를 모두 썼다는 건 '로마인'이라는 개념과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을 달리 바라봤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정말로 당대인들이 '[[로마인]]'을 '[[그리스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쓴 게 맞는다면, 서방이 동로마 황제를 굳이 '그리스인들의 황제'라고 명시할 필요도 없이 그냥 '로마인(= 그리스인)들의 황제'라고 불렀을 것이다. 서방의 'Romanorum'과 동방의 'Ρωμαίοι' 모두 똑같은 '로마인'이란 단어인데, 한쪽은 그대로 '로마인'이라고 번역해 주고 다른 한쪽은 '그리스인'이라고 바꿔서 번역하는 건 공평치 못한 처사로서 지극히 서방 중심적인 태도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원문의 '로마인'과 '그리스인'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에는 당연히 서로를 구분해서 번역해 줘야 한다. 다민족 국가였던 [[로마 제국]]의 신민 '로마인'은 절대로 특정 민족만을 지칭한 '혈연적인' 개념이 아닌 오늘날의 '미국인'과 같은 '국가적인' 개념이었기에, '로마인 안에 그리스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이 될지언정 '로마인은 곧 그리스인을 뜻한다'는 로마인의 개념을 지나치게 축소 정의한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휘하에서 장렬히 싸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그 출신이 [[그리스]]든 [[슬라브]]든 [[튀르크]]든 [[아르메니아]]든 상관없이 모두들 '로마인'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19세기]] 민족주의 시대까지 계속되어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정교회'''를 믿는 모든 민족들([[아르메니아인]] 제외)은 몽땅 통틀어 '룸(로마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는 Ρωμαίοι(로메이)로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을 엘리네스(ελλήνες)라고 칭하기 시작한건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인데다가, 좀 더 자주 칭하기 시작한 건 적어도 [[아나톨리아]]지역을 포기하고 그리스 쪽 영토로 과감히 눈을 돌린 [[안드로니코스 3세]]까지도 가야한다. ---- 메흐메트는 할릴 파샤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튀르크계 출신 귀족층을 제압하고, 무라트 2세 때에 정계에 진출한 [[데브시르메]] 세력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전제군주정을 수립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몇몇 유력 귀족들이 일치하는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같이 군세를 형성하는 [[유목제국]]의 성격이 강했던 초기 오스만 입장에서 이렇게 군주의 권위를 압도적으로 한방에 키우는 방법은 역시 '''전쟁, 그것도 군침 줄줄 떨어지는 스펙터클한 상대를 향한 대규모 원정'''뿐. 이에 따라 그는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여 유럽의 지배자를 자처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 술탄들은 모두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 그리고 그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술탄인 자신이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대도시를 정복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를 위해 145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남동쪽 보스포루스 해협 유럽 방면에 새로운 요새인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ı)[* 풀이를 하면 '로마 땅(Rumeli)의 요새(Hisarı)'라는 뜻. 오스만은 자신들이 점령한 동로마 제국의 유럽쪽 영토를 '로마인이 살던 곳'이라는 뜻에서 '루멜리(روم ايلى/Rumeli)'라고 불렀다. 당대 사람들이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한 증거 중 하나.]를 건설한다. 이는 바예지트 1세가 건설한 아나톨리아 쪽 요새와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완전한 장악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서유럽 방면에서 오는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외부 통행을 통제했다. [* 마지막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콘스탄티노플 맞은 편, 즉 갈라타(페라)에 제노바 자치구가 존재하긴 했고 흑해에도 [[제노바 공화국|제노바]] 식민지가 있었지만 당시 제노바는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론 끝까지 중립을 지켰고, 오스만 술탄국도 중립을 인정한 상태였다. 공방전 당시 갈라타에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알음알음 이런 저런 소규모의 지원을 하긴 하지만 공식적인 지원은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메흐메트 2세가 금각만에 함대를 들여보낸 뒤로는 완전히 끊긴다. 즉 보스포루스 해협의 요새들은 제노바를 견제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고 실제로 제노바는 당시에 오스만이 굳이 견제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었다. 그보다 콘스탄티노플 시가지 내부에 자치구를 가지고 있으며, 오스만의 해상 봉쇄를 단독으로 뚫어낼 여력도 있는 해상 강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 또는 만에 하나 십자군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그 외의 서유럽 세력 견제가 요새의 주 목적이었다. 그런 목적의 견제를 떠나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까지도 이어지는 오스만의 가장 큰 전략 목표 그 자체였다.] 이때 동로마 제국에게 남은 영토란 제후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모레아]]가 통치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전부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방어가 가능한 건 콘스탄티노폴리스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